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타카다 노부히코 (문단 편집) === 커리어 === [[파일:attachment/타카다 노부히코/63.jpg]] * 주요 승: 카일 스터젼, [[마크 콜먼]][* 둘 다 [[승부조작|워크]] 의혹이 있다.] * 주요 패: [[힉슨 그레이시]](2), [[마크 커]], [[호이스 그레이시]], [[이고르 보브찬친]], [[타무라 키요시]] * 무승부: [[미르코 크로캅]], [[마이크 베르나르도]] 1993년에 미국에서 [[UFC]] 1 토너먼트가 성황리에 개최되었고, 우승자인 [[호이스 그레이시]]는 격투계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이에 안죠 요지가 [[힉슨 그레이시]]의 도장에 도전했다가 힉슨에게 죽지 않을 정도로 얻어맞고 돌아오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부터 UWF 인터내셔널은 그레이시 주짓수를 물고 늘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종합격투기 단체인 PRIDE였다. 1997년 10월, PRIDE 1회 대회에서 타카다 노부히코는 '일본 프로레슬링의 명예 회복'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힉슨 그레이시과 대결했다. 하지만 그라운드에서 압도당한 끝에 암바에 걸려 패배했다. 심지어 암바가 제대로 들어가기도 전에 광속으로 탭을 치는 굴욕을 겪고 '''광속탭'''이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그래도 'U계 프로레슬링 vs [[브라질리언 주짓수]]'의 대립 구도는 큰 호응을 불러 일으켰고, 여기서 가능성을 발견한 DSE는 PRIDE를 존속시키기로 결정했다. 흥행의 선봉장은 사쿠라바 카즈시와 타카다 노부히코였다. 1998년 6월, PRIDE 3에서 타카다 노부히코는 당시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았던 킥복서인 카일 스터젼과 대결했다. 그런데 카일 스터젼의 움직임은 처음부터 이상했다. 게다가 카일 스터젼의 하이킥이 타카다 노부히코의 가드를 강타하자 타카다가 팔을 휘저으며 내동댕이쳐지는 황당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당시 북미 쪽 중계 영상을 보면 신나게 떠들던 바스 루턴이 순간 엄청나게 당황하는 반면 눈치 없는 파트너는 '''"저 친구 왜 저렇게 오도방정을 떨죠? 원래 스타일인가요?"'''라며 루턴의 속을 긁었다. 여기서 타카다 노부히코는 태클을 허용하여 가드에 몰렸지만 2분 만에 힐 훅으로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 경기는 카일 스터젼의 유일한 MMA 시합이다. [[파일:external/pds20.egloos.com/e0066657_4d7e4d6107870.jpg]] 1998년 10월, PRIDE 4에서는 힉슨 그레이시와 재대결했으나 암바에 걸려 패했다.[* 근데 경기 내용으로 놓고 봤을 때, 일본 내에서 힉슨을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보이긴 했었다. 다카다가 지리한 클린치 싸움 끝에 잠시나마 톱 포지션을 선점했기 때문. 그러나 다카다가 포지션이 굳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힐훅을 하려 했던 병크를 저지르자 쉽게 막히고 무난히 포지션이 역전되며 결국 이전 경기와 똑같이 암바로 패했다. 어쨌든 잠시나마 힉슨을 상대로 유리한 포지션을 점하는 장면을 연출한 덕분에 일본 내에서 힉슨을 잡기 위한 힉슨의 다음 경기 추진이 굉장히 활발했다. 그러나 후나키 마사카츠 전에서의 힉슨의 모습은 여전히 강했다.] 1999년 4월, PRIDE 5에서는 UFC 초대 헤비급 챔피언인 [[마크 콜먼]]과 대결했다. 'UWF 수장 vs UFC 왕자' 구도의 대결은 일본 팬들의 엄청난 주목을 받았으나, 이번에도 타카다 노부히코는 무기력하게 콜먼의 태클에 유린당하며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렸다. 그런데 2라운드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하위에 깔린 타카다 노부히코가 마크 콜먼의 다리를 잡고 기습적으로 힐훅을 성공시킨 것이었다. 관중들의 열렬한 환호에 경기장은 떠나갈 듯 달아올랐고 일본의 해설진은 광란상태에 빠졌다. [[파일:external/pds22.egloos.com/e0066657_4d7e4d5a444a8.jpg]] 하지만 2라운드에서 마크 콜먼의 움직임은 너무 이상했다. 상위 포지션을 잡고도 제대로 공격을 하지 않은 채 애매하게 타카다 노부히코의 허벅지만 두들겨댔고, 경기 후의 인터뷰에서도 "[[딸바보|난 두 아이의 아버지다. 거절할 수 없는 오퍼]]였다"고 말하며 의혹을 증폭시켰다. 그 뒤 한 기자가 다시 한 번 마크 콜먼에게 이 시합의 워크 의혹에 대해 묻자 콜먼은 노코멘트라고 말하며 답변을 회피했다. PRIDE의 브라질 해설가는 중계 중 대놓고 이 시합이 워크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마크 커, 호이스 그레이시 등에게 패배했다. 그리고 이고르 보브찬친에게도 패했지만 타카다 노부히코가 실전으로 치른 경기 중 제일 선전했던 경기였다. 조금이지만 그라운드에서 우위를 보였고, 1라운드 막판 스탠딩으로 전환한 이후 하이킥도 적중시켰다. 그러나 이고르 보브찬친은 하이킥을 허용한 후 순간적인 충격만 받았을 뿐이었다. 프로레슬러로 활동할 당시 하이킥이 [[피니시 무브]]였던 타카다 노부히코 본인의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경기가 흘러갔고, 2라운드엔 그라운드 상태에서 파운딩을 당하다 부상으로 인한 서브미션패를 당하고 말았다.[* 확실히 1라운드는 다카다의 우세는 분명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경기 당시 중계진들이 상당히 고무적인 텐션으로 중계했으니까.] PRIDE 7에서 프로레슬러인 알렉산더 오츠카를 [[리어 네이키드 초크]]로 꺾으며 연패의 사슬을 끊긴 했으나 이 경기는 전후 사정으로 보나 경기 내용으로 보나 종합격투기를 표방한 프로레슬링 경기였다. 타카다 노부히코가 공식적으로 밝히진 않았으나 경기 중 프로레슬링스러운 움직임이 눈에 띄게 많았고 결정적으로 DVD에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 게다가 [[https://www.youtube.com/watch?v=kfGQ01r_gcI|이 경기는]] [[셔독]] 전적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파일:external/pds20.egloos.com/e0066657_4d7e4d5ddb48f.jpg]] 2001년 11월에는 PRIDE 17에서 미르코 크로캅과 대결했는데 이노키 알리 포지션만 줄창 나온 끝에 무승부로 끝났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1라운드에서 미르코 크로캅의 왼쪽 종아리에 오른발로 로우 킥을 시전했는데, 1라운드 종료 후에 가진 인터벌타임에서 타카다 노부히코의 오른발 발등이 야구공 1개의 크기로 심하게 부어있었다. 이후 타카다 노부히코는 TV 인터뷰에서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해 '발을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고 토로했고, 경기 종료 후 의료진에 의해 전치 2개월의 진단이 떨어졌다. 타카다 노부히코의 마지막 MMA 시합은 2002년 11월에 PRIDE 23에서 타무라 키요시를 상대로 한 경기였다. 이 경기에서 타카다 노부히코는 타무라 키요시의 펀치에 맞아 KO패를 당했다. 경기 후 타무라 키요시는 "감사합니다. 여러가지 잘못을 저질러 죄송하고 지금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22년 동안 꿈과 감동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에 타카다 노부히코는 "더 이상 아무 미련도 없다. 타무라 넌 최고의 악역이었다."라고 답했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타무라 키요시를 부당하게 악역 취급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파일:external/pds21.egloos.com/e0066657_4d7e4d5558719.jpg]] 다만 이 시합도 워크 의혹이 있다. 일단 KO 직후 타카다 노부히코의 표정이 이상했다. 패배를 맞은 선수의 표정이라기보다는 뭔가 충격에 빠진 듯한 어이없는 얼굴이었다. 타무라 키요시의 마이크 워크 또한 의혹의 여지는 충분하다. 훗날 팬들의 의견은 타카다 노부히코가 승리하는 각본이었는데 타무라 키요시가 [[시멘트 매치|일부러 엎어버린 것]]으로 모아졌다.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두 사람 사이에 UWF 시절부터의 알력 다툼이 있었기 때문이다. 타무라 키요시는 UWF 인터내셔널의 간판이었으나 늘 인기는 타카다 노부히코에게 밀려 있었다. 그래서 타무라 키요시가 마이크워크로 타카다 노부히코한테 진검승부로 붙고 싶다고 말한 적 있는데, 이는 각본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다. 그러나 타카다 노부히코는 UWF의 인기에 힘입어 정계에 출마하게 되고, 선거 기간 동안 유세 활동을 하느라 UWF 인터내셔널이 개최하는 이벤트에 지속적으로 불참했다. 이에 갈등이 커질 대로 커지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타카다 노부히코가 낙선하게 되자 UWFi는 최악의 재정난에 봉착하게 되면서 결국 신일본 프로레슬링과의 합동 이벤트를 개최했다. 이때 타무라 키요시와 타카다 노부히코의 갈등이 폭발하며, 타무라가 참전을 거부하자 타카다는 타무라를 제명시켰다. 그러자 K-1 측에서 타무라 키요시에게 패트릭 스미스와의 경기를 제안했고, 타무라가 승리를 거두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결국 타카다 노부히코는 어쩔 수 없이 타무라 키요시를 UWFi로 복귀시켰지만 타무라 키요시는 마에다 아키라의 단체인 Rings로 이적해 버렸다. 타무라 키요시는 패트릭 스미스에게 승리하면서 자신이 생각한 '프로레슬링은 강하다'는 가치관을 증명했다. 결국 단체의 상황, 증명된 자기 실력, 타카다 노부히코와의 갈등이 더해져 이적을 한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인 1997년에 사쿠라바 카즈시가 UFC Japan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두 선수가 같은 가치관을 증명하고 각자 서로 다른 단체에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아무튼 비하인드 스토리와 무관하게 당시로서는 자못 감동적인 은퇴전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